결정이 틀렸을 때는 문제가 안 된다. 데이터를 찾고, 원인을 파악하고, 다음에는 더 나은 근거를 갖추겠다고 다짐하니까. 진짜 무서운 건 리서치 없이 감으로 내린 결정이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때다.
성공한 직관은 복리로 쌓인다
스타트업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 있다. PM이 사용자 인터뷰 한 번 안 하고 기능을 밀어붙였는데 지표가 올랐다. 팀은 축하하고, 그 PM은 "역시 내 감이 맞았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이면 괜찮다. 두 번 연속 맞으면 확신이 된다. 세 번째부터는 리서치 자체가 불필요한 비용처럼 느껴진다.
이게 복리로 작동한다. 직관이 맞을 때마다 리서치의 기대값이 떨어지고, 리서치를 건너뛸 때마다 직관에 대한 확신이 올라간다. 어느 순간 "우리 팀은 사용자를 잘 안다"가 문화가 되어버린다. 그런 팀에서 누군가가 "인터뷰 좀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이렇다 — "시간 없어, 빠르게 치자."
문제는 직관이 틀리는 순간이 아니라, 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는 체계가 이미 사라진 뒤라는 거다.
토스가 리서치를 조직 전체에 퍼뜨린 이유
토스 UX리서치팀이 재밌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리서치를 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 자체를 리서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왜 갑자기 모두가 리서치를 하고 싶어할까?
답은 단순했다. 직관으로 밀어붙인 기능이 실패하는 경험이 누적되면, 결국 "아 그때 물어봤으면 됐을 텐데"라는 후회가 쌓인다. 토스는 그걸 기다리지 않고, 아예 PM과 디자이너가 경량 리서치를 직접 돌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전문 리서처가 모든 프로젝트에 붙는 건 불가능하니까, 리서치의 진입장벽을 낮춘 거다.
핵심은 "리서치팀이 다 해줄게"가 아니라 "최소한의 검증은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방향이었다.
경량 리서치라는 타협점
"리서치 해야 한다"와 "시간이 없다" 사이에서 PM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뭘까.
정답은 거창한 방법론이 아니다. 5명한테 15분짜리 인터뷰를 하는 것만으로도 직관의 70%는 검증하거나 뒤집을 수 있다. 제이콥 닐슨이 수십 년 전에 말한 거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오픈서베이 같은 도구를 쓰면 설문은 하루면 돌릴 수 있고, 카카오페이처럼 내부 A/B 테스트 플랫폼을 만든 조직에서는 가설 검증이 배포 파이프라인의 일부다.
그런데도 리서치를 건너뛰는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리서치 결과가 내 가설과 다를까 봐 두려운 거다. 이미 로드맵에 올린 기능인데 사용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나오면? 스프린트 계획을 뒤엎어야 하니까. 차라리 모르는 채로 가는 게 편하다.
이건 PM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조직 구조의 문제다. 리서치 결과가 계획을 바꿔도 괜찮다는 심리적 안전망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리서치 방법론을 알아도 실행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실전에서 써본 것 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건 "결정 로그"다.
| 날짜 | 결정 | 근거 | 결과 (4주 후) |
|---|---|---|---|
| 3/15 | 온보딩 3단계 → 2단계 축소 | PM 직관 | 완료율 +12% |
| 3/22 | 결제 버튼 색상 변경 | PM 직관 | 변화 없음 |
| 4/01 | 알림 빈도 주 3회 → 주 1회 | 사용자 인터뷰 5건 | 이탈률 -8% |
이걸 한 달만 쌓아보면 패턴이 보인다. 직관이 잘 맞는 영역과 완전히 빗나가는 영역이 구분된다. 대개 PM이 잘 맞히는 건 자기가 매일 쓰는 기능이고, 빗나가는 건 자기가 타겟 사용자가 아닌 영역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이걸 데이터로 확인한 팀과 감으로 아는 팀의 행동은 완전히 다르다.
결정 로그의 진짜 효과는 "직관을 버려라"가 아니라 "직관의 적중률을 알아라"다. 적중률을 알면 언제 리서치가 필요하고 언제 그냥 가도 되는지 판단할 수 있다.
직관이 나쁜 게 아니다
오해하지 말자. 직관 자체는 PM의 핵심 역량 중 하나다. 경험에서 나오는 패턴 인식이고, 빠른 의사결정의 기반이다. 문제가 되는 건 직관을 검증 없이 신뢰하는 습관이 굳어지는 것, 그리고 그 습관이 성공 경험으로 강화되는 것.
리서치를 안 하고 맞혔을 때 "운이 좋았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PM이, 결국 더 오래 맞힌다.